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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강해 17]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
2023.11.22. 수요성서강해: 마가복음강해(17). 김충현 목사
막 5:35-43 [절망 중에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
지난 번 말씀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이었다.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고나서, 계속 해서 원래 가시고자 했던 야이로 회당장 집으로 가실 때의 일이다.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을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렇게 소식을 전했다(35절).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비보, 참으로 슬픈 소식이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만나러간 사이에 그만 딸이 죽고만 것이다.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이 오셔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님이 바쁘신 몸인데, 괜히 허탕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곁에서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36절).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사실상 부고 소식을 들었으면,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야만 했다. <너의 딸이 죽었으니, 참으로 안됐구나. 위로 받기 바란다. 이젠 내가 가도 소용없겠구나. 집으로 돌아가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믿음을 갖도록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애제자 3명,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만 데리시고, 회당장의 집에 가셨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 가셨을 때는, 이미 초상집 분위기였다. 38절에 증거된 거처럼,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 밖에 없었다. 인간적으로는 당연히 이런 분위기가 될 수 밖에는 없다. 죽음은 인간의 최대 절망적인 사건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절망적인 삶의 현장에서도 오히려 정반대로 희망적인 선언을 하셨다. 39절에 증거된 것처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미 회당장의 딸은 의학적으로 죽은 자로 판명이 났는데,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발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저, 예수, 헛소리하고 있다. 미쳤다.>는 식으로 조롱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으시고, 본격적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실행에 옮기셨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신 다음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회당장의 죽은 딸이 있는 곳에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외치셨다. 41절에 증거된 것처럼, <달리다굼>... 달리다움을 번역하면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회당장의 죽은 딸이 곧 일어났다. 42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일어날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했다. 걸었다는 것은 잠깐 살아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살았다는 뜻이다. 12살 아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사람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행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도, 비밀을 유지하도록 조치하셨다(메시야 비밀). 43절에 증거된 것처럼,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다고 했다. 그리고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지시하셨다.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아이가 완전히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죽은 아이를 앞에 두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절망하고 있었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는 절망할 수 밖에 없다. 낙담하면서 슬퍼할 수 밖에 없다. 죽음은 사람의 의지나 신념, 능력으로 해결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탄식 밖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그렇지만 그런 절망 앞에서도 예수님은 희망을 선언하셨다. 달리다굼... 이는 희망의 선언인데, 아람어로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다. 병행구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동작만이 기록했다. 마 9: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년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눅 8: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예수님은 죽은 아이를 마치 잠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는 것처럼,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고 부활이시기 때문이다. 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도 살리셨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시신이 있는 무덤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다(요 11:43).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기적! 이런 기적이 오늘날에도 가능할까?...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지금 우리 앞에서 있다면, 분명히 예수님은 분명히 이런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재림하실 때까지는 거기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는 12제자처럼 능력을 받았으니까, 예수님처럼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복음전하는 자들에게, 목사들에게 그런 능력이 주어졌다면, 병원들마다, 장례식장들마다 운영이 제대로 안될 것이다. 목사가 입관예식 전에 장의사들이 입관 절차를 진행할 때마다, <달리다굼>... <아무개야 일어나라>... 선언하기만 하면 시신들이 다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유족들은 기뻐하겠지만... 그런데 역사상, 세계 그 어느 장례식장에서도 시신이 다시 일어났다는 뉴스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오늘의 이 기적은 단지 1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인가?... 단지 예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주고 과시하는데서 끝나는 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큰 절망, 곧 죽음의 문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극복되고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사실을 보다 더 확실하게 증거해주고 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친히 몸으로, 삶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기적은 일어난다. 야이로의 딸처럼 나도 때가 되면 죽게 된다. 질병으로 죽을 수도 있고,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노환으로 죽을 수도 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어느 70대인 사람이 아파트 위에서 어느 아이가 던진 돌에 맞아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사람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젊은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몇 달 전, 어느 20대 청년이 건널목에서 실수로 악셀을 밟은 어느 운전자로 인해서 세상을 떠났다(장기기증). 어찌 보면 누구든지 항상 죽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죽게 되지만,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라는 자리에 영영히 머무는 것이 아니다. 비록 세상사람들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무덤에 있게 되지만, 때가 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가 되면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나 죽은 자를 향해서 희망을 선언하신다. <일어나라>... <아무개야, 일어나라>... 바로 그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면 된다. 만약 그때 <예수님, 안들려요. 예수님의 소리가 안들려요.>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토록 평소에 영적인 귀 관리, 믿음 관리를 잘해야 한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실 것을 믿는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절망 중에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디를 가든지 절망 중에도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만약 야이로 회당장의 집, 상가집에 갔더라도 거기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달리 표현한다면, 아무리 부정적인 상황에 처했더라도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단순히 인간적인 자신감이나 신념이 아니라 믿음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선언할 때, 하나님은 때가 되어서 기적 같은 역사를 이루신다.
저는 평소에 목회하면서 언제나 희망을 선언하면서 사역을 하고 있지만, 특히 장례식장에서 희망을 선언한다. 교인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슬퍼하는 자리가 교인의 가족 중에서 누군가 별세했을 때, 장례예식을 하게 되었을 때이다. 장례예식 중에서도 특히 입관할 때... 인간적으로는 가족들이 고인의 얼굴, 몸을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시간인데, 이 때가 되면 슬픔이 극에 달하게 된다. 저는 목사가 된 다음, 여러 교회에서 수많은 장례를 집례하면서, 그 모습을 봐왔다. 그 때마다 저 역시 같은 가족의 심정으로 함께 슬퍼한다. 그렇지만 단지 슬퍼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입관의 자리에서든지, 고인의 시신을 앞에 두고 저는 희망을 선언한다. 고인의 부활을 기도한다. 고인이 믿음으로 살았다면 반드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확신하면서, 희망을 전한다. 그러므로 입관의 자리는 인간적으로는 절망의 자리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희망의 자리이기도 하다.
죽음의 문제만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들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밀아야 한다. 삶의 여정에서 때로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질병의 문제로 인해서, 가정 문제로 인해서, 자녀들 문제로 인해서, 사업 문제로 인해서, 인간관계 문제로 인해서, 갑작스런 재난이나 사고로 인해서 낙담하고 좌절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 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절망의 현실, 그 자체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그런 현실을 극복하게 만드시는 분이 내 곁에 계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야이로 회당장의 집, 그 절망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던 것처럼, 내 삶의 여러 가지 상황들, 그 절망의 자리에도 전능하신 주,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내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역사를 이루신다. 어떤 문제가 생겼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적으로 최선은 다하지만, 그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은 예수님께 맡겨야 한다. 나는 다만 그 상황에서 오직 희망을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 <달리다굼>, <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믿음만이 능력이요 천국의 기적을 보는 열쇠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즐겨 부르는 복음송 중에 하나,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 의심말라 하시고 물결 위를 걸라 하시네 /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단지 노래가 아니라,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노래한대로,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선언해야 한다.
우리 인생 여정이 비록 절망의 연속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큰 절망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은 믿음만은 잃지 마시고 오직 희망을 선언하셔서 삶의 순간 순간 놀라운 기적들을 계속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집중 묵상 구절]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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